릴리트의 전승과 자아의 발견: 권력화된 신화 너머의 역사
최초의 여인 릴리트, 천사 루시퍼의 자아, 그리고 권력 사상과 동학 정신
1. 잊혀진 첫 번째 여자, 릴리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구 신화의 첫 장에서 아담의 짝은 하와(이브)다. 하지만 유대 민담과 외경의 오랜 전승을 들여다보면, 아담과 같은 날 흙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여인은 릴리트(Lilith)였다. 아담과 릴리트는 한동안 함께 삶을 꾸렸으나, 시간이 흐르며 피할 수 없는 갈등에 직면한다.
갈등의 원인은 명확했다. 릴리트는 아담과 자신이 동일하게 흙으로 지음 받은 동등한 존재라 믿었기에, 관계에서도 동등한 주체성을 요구했다. “왜 잠자리는 당신이 원할 때만 해야 하며, 나는 늘 밑에서 당신을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릴리트의 물음에 아담은 “신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대며 복종을 강요했다. 타협할 수 없는 벽창호 같은 대답 앞에 릴리트는 결단한다.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남는 대신, 짐을 싸서 자기가 좋아하는 뱀과 함께 홍해로 떠나 버린 것이다.

2. 자아를 가진 천사 루시퍼와의 만남
릴리트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아담이 외로워하자, 신은 비로소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두 번째 여인인 이브를 만들어 준다. 아담의 일부에서 태어나 복종적인 이브와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창세기의 정설이 되었다. 그렇다면 홍해로 떠난 릴리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곳에서 릴리트는 천사장에서 악마의 수장이 된 루시퍼를 만나 재혼한다. 본래 천사는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충직한 심부름꾼(메신저)이다. 그러나 일부 천사들은 지복의 상태 속에서 문득 자신만의 '자아'를 깨닫는다. “나는 왜 신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질문하는 천사는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천상에서 쫓겨나 악마로 낙인찍힌다.
수평적 삶을 갈망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릴리트와, 규율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자아를 정립한 루시퍼. 이 두 주체적 존재가 결합하여 홍해 근방에 자신들만의 자손을 퍼뜨렸다. 훗날 동생 아벨을 죽이고 세상으로부터 쫓겨난 카인이 흘러들어간 곳 역시 바로 이 주체적 방랑자들의 땅이었다.
존 콜리어(John Collier)作 《릴리트(Lilith)》 - 뱀을 감싸 안은 주체적 여인의 상징
3. 권력의 이념화와 잊혀진 신화
역사를 돌이켜보면 권력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지배와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상을 규범화해 왔다. 기독교가 정경(正經)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릴리트의 존재를 외경으로 밀어내고 '남성의 갈비뼈로 만든 이브'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偶然이 아니다. 순종과 복종을 가르치는 신화만이 권력 유지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동양의 주자학(성리학)이 삼강오륜과 명분론을 내세워 신분제와 가부장적 질서를 공고히 했던 과정과도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지배층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상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질문하고 반발하는 존재는 '악마'나 '오랑캐', 혹은 '사문난적'으로 몰아세웠다.
4. 밟혀도 죽지 않는 민중의 역사와 현대의 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금기시된 신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수천 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어떠한 권력과 교리도 인간의 주체적 열망을 완전히 짓밟을 수 없었음을 증명한다. 정사(正史)에서 기록되지 못하고 억압받으면서도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이 이야기는, 밟혀도 밟혀도 잡초처럼 다시 일어서는 동학혁명의 민중 정신과 닮아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기존의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금기를 깨뜨리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릴리트와 루시퍼야말로 독자적인 자아를 완성한 존재들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성공을 거둔 혁신가들의 모습 역시, 지배적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쓴 '악마의 자식들'의 형상과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